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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백난아의 찔레꽃 -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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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홍석 이학박사·전 동국대교수 겸 학장·논설위원

KBS에서 '인기곡100공을 선정'할 만큼, 가요(歌謠)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삼한(三韓)시대부터, 북치며 노래해온 '풍습과도 관계'된다. 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마저 '위를 향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한편, 아래를 향해 대중과 춤추며 노래하는 일'을 권장해왔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대중가요도, 전통문화계승의 단면이 된다. 인기곡가운데서 첫째순위에 오른 것은 "백난아의 찔레꽃"이다. 

그는 제주출신여가수란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작으면서 변방(邊方)에 놓인 것이 제주도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가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주출신이 우뚝 섰음'으로, 도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만든다. 근본에서 제주여성이 갖는 용감성, 오씨(吳氏)집안이 갖는 내력과 무관치 않다. 인과응보의 글귀처럼,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여성의 용감성은 "설문대할망"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왔다. 여기에다 오씨(吳氏)혈통하면 고려태조의 왕후이면서, 혜종(惠宗)을 낳은 '장화(壯和)왕후를 떠올려'왔다. 둘의 만남은 왕건이 후(後)삼국통일을 위해, 영산강으로 다가갔을 때 시작됐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간섭과 충언(忠言)만을 앞세워'왔음으로, 전쟁터를 맴돌던 왕건에게 부담이 됐다. 

이를 뒷받침하듯, 왕건은 십훈요(十訓要)에서 '차령산맥이남사람을 기용하지 말라'는 글귀를 남겼다. 포근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왕후처신에, 불만이 터진데 따른 것이다. 그만큼이나 오씨집안 딸들은 '고집이 세고 충직(忠直)하며, 혈기왕성한 성품을 가져왔다. 가요계의 큰 별인 백난아도 '본명이 오금숙(吳金淑)'임으로, 오씨 집안의 후예다.  

거기에다 '금메달을 상징하는 이름'을 앞세워왔으니 '희망찬 꿈에 젖어있을 것'은 당연하다. 또한 출생지가 전통마을인 명월임으로, 지연(地緣)에 근거한 제주여성의 기질, 오씨의 혈통까지 겹치게 됐다. 고집과 기백하면, 최(崔)-강(姜)-안(安)씨를 떠올린다. 하지만 오씨(吳氏)는 수량이 많지 않은데서 알려지지 않았음으로, 이번기회를 통해서 '강인한 성품'을 보이게 됐다. 

오금숙은 1927년에 태어났다. 3세의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만주(滿洲)로 이주해감으로써, 유년기부터 빈곤과 역경(逆境)을 이겨내며 '극기력(克己力)을 배양'해왔다. 여기에다 9세 때에는 다시 함경북도로 이주했고, 부친이 사망하면서 '고행(苦行)이 증폭'됐다. 하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글귀'처럼, 그에게는 인내를 통한 행운을 맞는 전환점이 됐다.  

통학 길에서 '항시로 접촉해온 것'은 악기(樂器)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게주인과 소통하는 사이로 발전하면서 '능력에 대한 점검기회'를 갖게 됐다. 결과는 '음악성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았고, 이를 계기로 "청진에서 개최한 콩쿨"에 참가하게 됐다. 결과는 1등을 차지함으로써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게 됐다. 때는 바로 1940년이고, 13세의 소녀였음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15세 때에는 콜롬비아-태평양레코드가 주관하는 콩쿨대회에서, 1등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을 누볐고, 1980년에는 '고향에서도 공연'을 열었다. 출생지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란 글귀로, 시작되고 있다. 이런 단편적인 모습만으로도 '인사유명(人死留名)의 글귀'를 실감하게 만든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후속세대에게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오홍석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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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8, 2020 at 08:1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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