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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해남의 소나무 그늘 아래서 -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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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복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요마적에 공무로 전라남도 해남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공무와는 별개로 나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청사 앞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였다. 그 나무의 자태가 얼마나 늠름한지! 그 둘레가 너끈히 두 아름은 되어 보였고, 높이도 인접한 군 청사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우람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귀가 번쩍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내가 즐겨 애송하는 시문 가운데 충암 김정(金淨, 1486~1521)이 지은 <길 옆 소나무 아래에서 절구 3수를 짓다[題路傍松三首]>란 시가 그 순간 연상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꼭 오백년 전인 조선조 중종(中宗) 15년(1520년) 8월에, 충암 김정은 한해 전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된 채 제주로의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이때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려고 해남의 나루터에 잠시 머무르게 되는데, 아마도 이곳 관두량 포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바닷가의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절구(絶句) 세 수를 지었는데, 유배인의 처지라 그 행장이 변변치 못했기에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서 거기에 시를 써서 남겨놓았다고 한다. 

"더위에 지친 길손들 시원하게 해주려고(欲庇炎程?死民) / 먼 골짝 마다하고 긴 몸 휘어진 채 있구나(遠辭岩壑屈長身). / 날마다 도끼질하며 행상 땔감용으로나 찾게 하니(斤斧日尋商火煮) / 진시황같이 그대의 공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라(知功如政亦無人)."

이 시의 마지막 한 구절은 그 표현된 함의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진시황의 이름자인 '政(정)'자를 내세워 자신의 이름자인 '淨(정)'자를 메타포로 포장해 표현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의 본 이름은 '영정'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시황제본기(始皇帝本紀) · 봉선서(封禪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진시황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泰山)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자 인근 소나무 아래로 급히 몸을 피했는데, 비가 그치자 진시황은 그 나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오대부(五大夫)'란 벼슬을 내렸다. 현재도 중국 태산에 가보면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고목의 소나무가 실재한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속리산의 '정이품송(正二品松)'도 이와 비슷한 사례이다. 조선조 세조(世祖) 때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임금이 어느 날 법주사로 행차하다가 가마를 가로막던 소나무 가지가 절로 올라가면서 통행이 가능해지자 임금이 특별히 그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란 벼슬을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수령 오백년 된 해남 고을의 한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새삼스레 오백년 전의 인물인 한 제주 유배인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의 소나무가 과연 오백년 전 충암이 쉬어갔던 그 소나무인지 그 진위여부를 단정할 순 없어도, 소나무의 공덕이 곧 한 인물의 공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동인으로 강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충암은 비록 유배인의 신분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음에도, 당대 제주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이란 저술을 남겨놓았다. 이로 말미암아 오백년 전의 제주 사회상과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고 재인식해냄이 가능해졌다.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사실상 소중한 기록문화의 유산을 제주민들한테 선사한 셈이다. 그런데 올해로 충암 김정 선생이 제주에 입도한지 꼭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건만 제주는 여전히 조용하다. 이런 소중한 업적을 남긴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학술행사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고대해본다. 

현행복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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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4, 2020 at 04:31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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