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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내겐 아직 9개의 트윙키가 남았습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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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로 세상이 망했지만 여전히 꿋꿋히 살아가고 있는 탤러해시는 흰색 크림이 든 노란색 스폰지 케이크 '트윙키'라면 사족을 못 쓴다./소니픽처스코리아

좀비를 소재로 삼는 순간 게임이든 영화든 일정 수준 운명이 결정된다. 좀비는 웬만해서 잘 죽지 않고 물리면 전염된다. 덕분에 좀비의 수는 늘어나고 인간의 수는 줄어든다. 서사는 필수적으로 남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발버둥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좀비가 잘 안 죽거나 물리면 전염되는 설정은 바뀌지 않지만 생존의 발버둥에서 심각함을 적절히 덜어내고 다른 요소를 채우면 사뭇 다른 영화가 된다. ‘좀비랜드(2009)’가 대표적인 예이다. 주인공들의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을 정도로 심각함과 거리를 두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1시간 40분도 채 안 되는 러닝 타임 동안 그저 좀비를 잘, 혹은 재미있게 죽이는데 집중한다. 덕분에 영화는 좀비가 아무리 많이 등장해도 그저 유쾌하다.

트윙키(Twinkie)의 출연 또한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영화가 심각함에 수렁에 빠지지 않는데 일조한다. 영화 초반 탤러해시(우디 해럴슨)의 약점으로 소개되는 케이크 말이다. 애초에 험하게 살아서 좀비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탤러해시지만 트윙키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래서 고속도로 외곽에 자빠져 있는 트윙키 제조업체 호스테스(Hostess)사의 유통 트럭을 발견하고 환호하지만, 트윙키 아닌 다른 제품만 들어 있자 좌절한다. 이후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트윙키는 어쩌면 좀비로 점철된 세계에서 생존보다 더 강렬한 욕망의 원천으로 그를 지탱한다.

트윙키가 대체 뭐기에. 트윙키는 흰 크림이 들어찬 노란색의 스폰지케이크이다. 어른의 엄지와 검지를 합친 길이와 크기로, 우리로 치자면 초코파이류처럼 개별 포장된 간식용 케이크이다. 1930년에 제과제빵 전문 업체인 호스테스(Hostess)사에서 딸기가 제철이 아닐 때 노는 케이크 틀을 활용하려고 개발했다. 원래 바나나크림을 채웠으나 세계 2차대전때 바나나가 귀해지면서 대신 채운 바닐라크림이 더 인기를 얻어 오늘날의 트윙키가 완성되었다.

'트윙키'는 미국 호스테스사가 1930년 출시한 흰 크림이 들어찬 노란색의 스폰지케이크로, 국내 초코파이류처럼 간식용으로 개별 포장된 상태로 판매된다./위키피디아

사전 정보 없이 접하면 트윙키는 그저 무해해 보이는 대량생산 식품일 뿐이다. 하지만 무려 39가지나 되는 재료의 목록 때문에 유명세의 상당 비율을 불량식품의 대표격으로 누려 왔다. 오죽하면 미국에 10년 가까이 살았던 나조차도 트윙키를 사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나 수퍼마켓에서 조금이라도 궁금해 보이는 음식은 꼭 사먹어 보았건만, 트윙키에는 신기하게도 손이 가지 않았다. 1930년에 개발됐으니 역사도 깊어 트윙키는 일종의 문화적인 상징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역사며 생산 공정 등의 정보가 담긴 다큐멘터리도 많이 보며 궁금함을 품었지만 차마 먹지는 못했다. 호기심이 일다가도 수퍼마켓에서 발견하면 왠지 꺼려서 집어 들지 못했다. 노란 색깔부터 촉촉함을 잔뜩 머금고 비닐에 싸여 있는 형국 등이 음식보다 모형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겨 무서웠다.

트윙키를 향한 대중의 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건강 식품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트윙키는 대중의 공적과 같은 지위를 누리며 ‘밈(meme)’의 반열에 진입했다. 말하자면 트윙키를 우롱하는 게 일종의 스포츠처럼 자리 잡았다. 저자 스티브 에틀링어는 트윙키에 쓰이는 39가지 재료 모두의 발자취를 추적해 ‘트윙키 대해부(Twinkie, Deconstructed)’라는 책을 냈다. 물론 트윙키에게도 억울한 구석은 있었다. 39가지나 되는 재료를 썼다고는 하지만 절반 이상이 증점제나 방부제 등의 식품 첨가물이었으며 각각 전체의 2% 이하인 미량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트윙키는 오명을 한 켜 더 뒤집어 써야만 했다. 방부제를 포함해 그처럼 많은 첨가물을 썼으니 썩지 않을 거라는 도시전설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하면 지구에는 바퀴벌레와 트윙키만 남을 거라는 농담도 엄청나게 유행을 탔다. 심지어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리’에는 이런 농담을 반영한 장면도 있다. 인류가 버린 지구를 쓸쓸히 청소하는 월리가 잠들기 전, 동무인 바퀴벌레에게 트윙키(영화에서는 ‘크리미’라는 이름이 붙어 나온다)를 먹인다. 원인은 좀 다르지만 ‘좀비랜드’의 세계에서도 트윙키가 등장하는 건 종말적 맥락 덕분이다.

트윙키의 영원불멸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도 실제로 이루어졌다. 미국 메인 주의 조지 스티븐스 아카데미에는 1976년부터 유리 상자에 담아 보관한 트윙키가 아직 남아 있다. 한편 유튜브만 가볍게 뒤져보아도 ’20년 넘은 트윙키를 맛보다' 같은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트윙키는 정말 영원히 썩지 않는 걸까? 방부제 덕분에 곰팡이가 슬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분이 빠져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주머니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넣어 놓고 잊고 있었는데 1년 뒤에 보니 썩지 않았더라’ 같은 화제의 기사와 결말이 같다.

‘엇, 트윙키다.’ 그런 트윙키를 연남동 사러가마트 상가의 ‘미제집’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반가우면서도 껄끄럽달까? 수요가 있으니 파는 것일 텐데 대체 누가 트윙키 같은 음식을 정식 수입도 아닌, 이른바 어둠의 경로로 찾아 먹는지 궁금해졌다. 한편 완전히 사그라들었노라 믿은 내 안의 호기심이 다시 피어 오르는 걸 느꼈다. 이토록 오랫동안 맛이 궁금했다면 정말 한 번은 먹어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도 단숨에 행동에 옮기지는 못하고 그냥 집에 돌아가 일주일을 더 고민하고 나서야 한 상자를 사왔다. 10개 들이에 1만2000원. 왠지 밀거래 분위기라도 내보고 싶어서 현금으로 물건 값을 치렀다.

존재를 알고 거의 20년 만에 비로소 먹게 된 트윙키는 굉장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맛이었다. 첨가물 없이 밀가루, 계란, 설탕 등 가장 기본적인 재료만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맛과 향, 질감을 지녔다고나 할까? 짠맛이 강조돼 한층 더 두드러지는 단맛과 날카로운 바닐라 향이 이 세상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촉촉함 속에 둘러 싸여 있는데, 먹을 때에는 잠시 황홀하지만 곧 불쾌함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무슨 영문인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한 개를 먹고 나니 세상만사가 덧없어져, 그대로 소파에 누워 다음날 아침까지 잤다. 나에게는 아직 아홉 개의 트윙키가 남아 있다. 더 먹을 엄두가 안 나니 나 또한 실험이나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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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2, 2020 at 04: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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